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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북

Scandinavia Design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3국

외국의 한 슈퍼마켓에서 디자인이 너무 예쁘다는 이유로 먹지도 못할 소금을 사본 적이 있는가? 28kg의 무게만 허용하는 가방 안에 들어가지도 못할 의자와 양탄자를 사고 싶어 발을 동동 구른 적은? 만약 그런 적이 있다면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3국을 여행하는 건 꽤 힘들 일이 될지도 모른다.

모든 여행이 시시해지는 순간, 설마 나에게 그런 날이 도래할 줄은 몰랐다. 이 나라 성당이나 저 나라 교회가 다 비슷해 보이고, 그 고딕 양식의 성이 뮌헨에 있었는지, 비엔나에 있었는지 가물가물해지는 상태. 도시는 도시였고 시골은 시골이었다. 스무 살, 내 생애 첫 배낭여행 일기는 매일이 감탄사로 가득 찼지만, 서른넷의 여행은 더 이상 소녀 같은 일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15년 동안 참 부지런히도 다녔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미국에서 남미로, 거기서 다시 쿠바로. 날품팔이 노동으로 돈이 모일라치면 내 발걸음은 언제나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여전히 여행지를 정하고, 짐을 싸고, 공항에 가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지만, 일단 비행기에서 떨어지면 모든 게 시큰둥해졌다. 이제 여행을 그만둬야 하는 걸까. 또래 친구처럼 적금, 보험, 펀드, CMA 같은 단어 속에 월급이란 녀석을 적당히 나누어 담아 미래를 향한 건전한 꿈을 꾸어야 하는 건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점이었다. 


그 끝은 도쿄였다. 홍대 앞 골목들이 그대로 베껴오기에 성공한 일본의 카페들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고, 늦겨울의 추위는 어딘가 따뜻한 곳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만 부추겼다. 그렇게 잔걸음으로 발을 옮긴 곳은 지유가오카의 디자인 스토어 ‘시보네(CIBONE)’였다. 매장을 두리번거리던 중<스톡홀름의 부엌>이란 책을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었다. 바로 그 순간, 번쩍하는 것이 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그 책 안에 펼쳐진 이국의 부엌 풍경은 소명을 다한 채 꺼져가던 내 여행 로망에 던져진 구급의 번개탄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내 머릿속은 온통 ‘스.칸.디.나.비.아.’뿐이었다. <스톡홀름의 부엌>이 불을 지핀 이 신세계에 대한 관심은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보여준 헬싱키의 식당 풍경으로 절정에 올랐다. 줄지어 놓인 노란색과 하늘색 주전자, 스트라이프 찻잔, 금속이지만 차갑기보다는 믿음직한 느낌이 드는 냄비와 솥, 단순하지만 따뜻한 나무 탁자와 매끄러운 선을 가진 의자. 눈에 대한 특별한 감각을 가진 ‘스밀라’가 그토록 차갑고 시리게 묘사한 코펜하겐의 풍경조차 이 불길을 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두 계절을 지난 후, 마침내 나는 스칸디나비아로 향하는 짐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저 예쁜 것들을 다 훔쳐오고야 말리라.

북유럽으로 가는 빠르지 않은 방법 덴마크•스웨덴•핀란드의 3개국을 여행하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 2008년 대한민국에 취항한 핀에어를 타고 10시간이 채 안 되는 루트로 서울에서 헬싱키로 바로 날아가는 방법이 있고, 파리나 런던 등 유럽 대륙의 큰 관문을 통해 들어갈 수도 있다. 나는 비교적 저렴한 취항지인 네덜란드를 통로로 유럽 도시 간을 이동하는 저가 항공 스털링(sterling)을 선택했다. 암스테르담에서 코펜하겐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칸 페테르센은 덴마크 국립미술관에서 일하는 정말 다정한 아주머니였다. 우리는 그 짧은 비행시간 동안 작가 페터 회를 이야기했고, 그의 책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의 배경이 되는 크리스티안스하운(Christianhavn)의 독특한 역사와 자치 형태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그녀의 권유에 어쩔 수 없이 받아 문 석탄 맛 나는 블랙 캔디만 아니었다면, 페테르센 아주머니에 대한 기억은 완벽했겠지만 말이다.



DENMARK, COPENHAGEN
보통 사람의 허리보다 높은 안장을 장착한 자전거의 도도한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 코펜하겐에서 처음 찾아간 곳은 두말할 것도 없이 월페이퍼 시티가이드가 ‘페이버릿 숍’이라고 꼽은 ‘레트로그라드’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여의도쯤 되는 도시 속 섬인 브리게에 위치한 이곳은 연인 사이인 시그네 야르프와 모르겐스 페테르센이 운영하는 아주 작고 소박한 가게였다. 1950~60년대 빈티지 부엌 소품을 파는 이 가게는 통째로 컨테이너에 실어오고 싶을 만큼 욕심나는 물건들로 가득했다. 페테르센이 직접 발품을 팔아 구해오는 물건들은 으레 ‘앤티크’나 ‘레트로’라는 말이 부풀리기 마련인 가격을 배반하고 2만원에서 5만원대였다. 그는 그것을 ‘합리적 가격’이라는 말 대신 ‘행복한 가격(happy price)’이라 칭했다. 지갑과 욕망의 오랜 전투 끝에 하늘색 ‘프라이팬’ 하나를 전리품처럼 집어 들며 물었다. “그나저나 그릇이나 찻잔은 그렇다 쳐도 솥이며 냄비가 어쩌면 이렇게 예쁜 거예요?” 페테르센은 여성의 지위가 점점 상승되던 50~60년대, 설거지 같은 가사 노동을 줄이기 위해 냄비가 바로 식탁에 놓이게 되었고, 조리 기구인 무채색 냄비가 점차 식기의 색과 디자인을 입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가게 바로 옆에는 여자친구 야르프의 작은 스튜디오 겸 오피스가 딸려 있다. 덴마크 왕립예술대학에서 수학했고 현재도 작품 활동과 전시를 쉬지 않고 있는 야르프에게서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개발된 신소재가 부엌 용품의 소재와 디자인에 미친 영향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친절한 가이드를 따라 작은 박물관을 꼼꼼히 구경한 느낌. 2만원짜리 ‘프라이팬’ 손님에게는 과할 정도로 알찬 투어인 셈이다. 오르막 없이 거의 평지로 구성된 코펜하겐은 그야말로 보행자나 자전거의 천국이다. 대중교통수단도 깔끔하게 구비되어 있지만 이곳저곳 구경하다보면 꽤 긴 거리를 도보 여행자처럼 걷기 일쑤다. 레트로그라드가 있는 브리게 섬에서 다시 코펜하겐 시내로 걸어오니 허기가 밀려온다. 여행자에게 한끼 식사는 때론 어떻게든 때워야 하는 귀찮은 의례일 수도, 때론 매번 새로운 메뉴로 채워지길 바라는 또 하나의 관광 코스기도 하다. 고르고 고른 끝에 선택한 곳은 이름 그대로 ‘세탁카페’(Laundromat cafe´)였다. ‘코인 세탁기에 묵은 빨랫감을 넣고 기다리는 시간 동안 머무는 카페’를 테마로 하는 이곳의 메뉴는 ‘클린 브런치’와 ‘더티 브런치’라는 기발한 이름을 달고 있었다. ‘깨끗한’ 점심 하나와 ‘더러운’ 점심 하나를 시켜 동행한 친구와 나누어 먹고 길을 나서니 벼룩시장이 열려 있다. 노천 시장이나 벼룩시장에 대한 무한 애정으로 충만한 나 같은 여행자에게 코펜하겐의 벼룩시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기껏해야 낡은 장신구나 수동카메라, 빈티지 드레스를 사기 위해 기웃거린 기존의 벼룩시장과 달리 덴마크의 벼룩시장은 ‘로얄 코펜하겐’의 값비싼 도기를 비롯해 스칸디나비아 가구 특유의 컬러와 디자인을 엿볼 수 있는 진귀한 쇼케이스장이었다. 특히 빛바랜 풀색의 소파는 너무 탐이 나는 나머지 몇 십 분 동안 그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게 했다. 물론 내 머릿속에서는 그 커다란 소파를 이고 공항으로 가는 모습이, 그러다 문제가 생겨 비행기에서 쫓겨나는 극적인 상황이 58만 번쯤 시뮬레이션되고 있었다.


SWEDEN, STOCKHOLM
뉴욕에 소호가 있다면 스톡홀름에는 소포(SoFo, South of Folkungagatan)가 있다. 각종 디자인 숍이 밀집한 패션 디스트릭트 ‘소포’는 스웨덴 젊은이들의 옷차림과 라이프스타일을 실시간으로 확인해볼 수 있는, 눈앞에 펼쳐지는 스트리트 패션 매거진이다. 특히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선명한 컬러의 조명, 가구, 소품이 감각적으로 디스플레이된 가게를 하나하나 방문하다보면 그 자체가 바로 ‘모던 아트 뮤지엄 투어’처럼 느껴질 정도다. 물론 박물관의 작품을 살 여유는 없지만, 아름다운 것에 대한 욕구가 끓어오르는 이들의 위한 해방구 역시 마련해놓은 것이 스웨덴이란 나라의 미덕이다. 스웨덴이 낳은 세계적 스타는 단연 ‘아바’지만, 스웨덴을 전 세계로 뻗어 나가게 한 주인공은 바로 ‘이케아(IKEA)’다. 저렴하지만 감각적인 디자인을 선보이며 서민의 품위를 지켜내는 이곳은 우리나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대도시에 특유의 공장형 매장이 있을 정도다. 물론 스웨덴 매장은 본고장답게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시내에서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도착해 이케아 쇼룸을 구경하는 것은 그 자체로 스웨덴 가정집을 방문하는 것 같은 경험이다. 거기엔 그들의 욕실이 활짝 문을 열고 있고, 그들의 침실이 은밀히 허락된다. 부엌을 기웃거릴 수 있고, 옷장을 훔쳐보는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나처럼 집과 가구, 부엌과 소품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케아 매장은 아침에 도착해서 폐장 시간까지 놀고 싶은 최고의 테마파크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슈퍼마켓은 디자인 도서관이다. 스웨덴의 상장이라고 할 수 있는 목각 말 ‘달라(Dala)’ 문양부터, 저마다 다양한 디자인 패키지로 싼 제품들은 읽고 싶어 안달이 난 책들처럼 유혹하듯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스웨덴 우유 팩의 다양하고 귀여운 디자인은 한 동양 여자가 스톡홀름 유스호스텔 세면대에서 다 먹은 우유 팩을 씻어 우리나라로 공수해오는 저렴하고도 괴상한 풍경을 연출하고야 말았다

FINLAND, HELSINKI
스웨덴에서 핀란드로 가는 가장 즐거운 길은 단연코 실야 라인(Silja Line) 케빈에서 보내는 하룻밤이다. 내부에 카지노까지 갖춘 대형 페리를 타고 새벽 배 위에서 보는 헬싱키의 장엄한 풍경은 그 도시와 닮았다. 덴마크나 스웨덴보다 좀 더 단순하면서도 힘 있는 디자인이 느껴진다고 했더니 누군가 그것은 “아마도 알바 알토 때문이다.”라고 귀띔해준다. 핀란드 모든 곳엔 알바 알토가 숨 쉬고 있었다.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가장 ‘핀란드적’으로 사고한 이 천재는 도시 곳곳에 자연을 닮은 건축물을, 북유럽의 청명한 빛이 고스란히 내려앉는 서점을, 핀란드산 자작나무를 십분 활용한 유연성 있는 가구를, 어머니 나라의 호수를 닮은 꽃병을 만들어놓았다.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핀란드 하면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휘바 휘바’ 자일리톨일 것이다. 

헬싱키 슈퍼마켓에서 산 자일리톨 껌 위에 그려진 캐릭터는 핀란드의 동화 작가 토베 얀손이 창조한 ‘무민’이었다. 일본에서 캐릭터 상품으로 히트하면서 역으로 유명해진 무민의 주인공은 얼핏 ‘히포’를 연상시키는 북유럽 숲 속에 사는 요정이다. 일 년 중 반은 오후만 되면 어둑해지는 오로라의 나라, 일 년 중 반은 자정까지 밝은 백야의 나라에서 나올 법한 이 모험으로 가득한 신비로운 동화는 <카모메 식당>에서 사치코와 미도리가 만나는 첫 장면에 미도리가 읽고 있던 책이기도 했다. 

사실 핀란드 여행을 마치고 <카모메 식당>을 다시 보면 이 영화가 얼마나 핀란드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자 애썼는지 알 수 있었다. 사치에가 ‘커피 루왁!’이라는 주문과 함께 내린 커피를 담아내던 스트라이프 무늬의 커피 잔은 이탈라(ittala) 제품이고, <카모메 식당>을 채운 식탁과 의자는 알바 알토가 만든 가구 브랜드 아르텍(Artek)의 것이다. 가방을 잃어버린 마사코가 백화점에서 사 입고 등장한 과감한 패션은 핀란드산 세계적 패브릭 브랜드 마리메코(marimmekko)였다. 선글라스를 끼고 나란히 누워 있던 여자들. 훌쩍 집을 나가버린 남편을 저주하며 상처 입은 여자도, 20년간 병든 부모를 간호하며 청춘을 저당 잡힌 여자도, 그 순간만큼은 모두 바쁘게 움직이던 젖은 손을 멈추고 스칸디나비아의 여름 해를 향해 몸을 누인다. 아름다운 언덕이 있는 헬싱키 카이보푸이스토(Kaivopuisto) 공원 끝에 놓인 ‘카페 우르술라’는 발틱 해의 노을과 만나는 가장 완벽한 장소다. 간단한 청어 샌드위치와 커피 한 잔, 신문 읽기로 저녁을 맞이하는 백발의 노인들 틈에 끼어 나 역시 <카모메 식당>의 그녀들처럼 바다를 본다. 그날은 내 여행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사실, 돌아오는 배낭은 생각한 것보다 무겁지는 않았다. 스칸디나비아의 아름다움은 내 작은 배낭이 품을 수 있는 용량 너머에 있었다. 하지만 기와지붕으로 둘러싸인 가회동 내 작은 집 창가에는 덴마크 벼룩시장에서 찾아낸 오렌지색 낡은 스탠드가 불을 밝히고, 스톡홀름에서 뛰어온 목각 말 두 마리가 조용히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헬싱키 벼룩시장에서 2유로에 건진 레트로 플라워 커피 잔에 담긴 커피가 초겨울 추위를 데워주는 오늘 밤, 나는 생각한다. 이 여행이 내게 준 즐거움을 기억한다면 얼마간은 적금 따위와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고 해도 행복할 것이라고. 스칸디나비아에서 보낸 몇 주. 잃어버린 내 여행의 영혼은 루브르 박물관이 아니라 낡은 커피 잔 속에 숨어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보고 온 것은 3백 년 된 성당도, 관광객의 동전을 훔치는 분수대도 아니었다. 그들의 부엌과 침실을, 거리와 카페를 뒤덮은 매혹적인 색과 기운이었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아름다움을 가진, 미물을 향한 여행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글, 사진 : 백은하(<10 매거진>(www.10-magazine.com) 편집장이자  <안녕 뉴욕>의 저자)